장애인가족 행복페스티벌 수기집 2 대 회 사 김 광 환 (사)한국지체장애인협회 중앙회장 장애인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자연의 법칙은 여전히 변함없어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유난히도 힘겹게 느껴졌던 지난 여름날의 무덥고 습했던 열기도 점차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오곡이 무르익는 풍요로움을 바라보면서 태풍이 거칠게 불어와 집중호우를 쏟아 부으며 할퀴고 간 깊은 상처와 시름을 잠시 잊게 합니다.이렇듯 우리네 인생 여정에도 삶의 굴곡과 아픔이 반복됩니다. 더구나 평생 감당해야 할 육체의 장애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우리 삶에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따스한 가슴으로 서로를 품어 안으며 서로를 위로 할 수 있음으로 인해 역경과 질고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올해도 삶의 무게를 견디며 씩씩하게 살아 온 장애인 가족을 위로하고자 장애인가족 행복 페스티벌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성들여 써내려간 삶의 행적을 읽으면서 눈시울 붉히게 하는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장애인은 무거운 족쇄와도 같은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다. 겉 으로 보기에 무거움과 가벼움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고통의 무게는 서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차라리 좌절하며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불쑥불쑥 3 다가오곤 합니다. 마치 밀려드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내면의 갈등을 겪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넓히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온 이야기는 그 자체만 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안겨주는 한편의 드라마입니다.삶의 수기를 보냈으나 이번 축제의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분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소 표현이 섬세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글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 깊이 담겨 있는 진실함을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삶을 이어가는 그 모습이 가장 고귀하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참여하신 모든 분이 최고의 수상자입니다.이 축제는 주변으로부터 주목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장애인가족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입니다. 여러분께 드리는 상장의 의미보다는 그동안의 노고를 서 로 보듬으며 마음을 나누기 위한 시간입니다.우리 협회는 우리나라 장애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인권을 지키며, 마땅히 누려야 할 권익을 찾아주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한 장애인식 개선 활동은 물론 다양한 문화를 누리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사회 모든 분야를 살펴보고 각종 불합리한 제도개선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협회는 장애인 단체의 맏형으로서 ‘장애인이 편안하면 모두가 편하다’는 자세로 장애인의 처우개선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모처럼 갖는 이 행사를 통해 그동안의 무거운 마음의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가 새로운 전환점이 되고, 본인의 삶에 활력을 안겨 주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늘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감사합니다. 2022. 10. 5.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중앙회장 김광환 C O N T E N T S 대 상 김 예 빈 | 행복은 우리가 만드는 것 ················ 7 최우수상 배 순 단 | 잘한다! 잘했다! 배순단! ················ 13 성 우 경 |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 22 하 재 필 | 우리 가족에게 훅 들어온 비나리 ················ 26 우 수 상 구 정 서 | 우리의 소중한 삶 ················ 42 김 형 자 | 야발라바히야 ················ 47 박 준 형 |
가족과 함께 한 나의 로또인생 ················ 51 오 정 은 | 행복의 꿈꾸는 법칙 ················ 60 예 옥 주 | 힘겨웠지만 행복합니다 ················ 66 정 운 철 | 가족사진 ················ 74 오 현 자 | 나의 작은 천사 ················ 77 이 만 우 | 시련에 처방전은 가족이다 ················ 83 허 연 순 | 아픔을 딛고 만난 행복 ················ 88 특 별 상 강 현 수 | 다음 생에는 지친 두 눈을 뜰 수 있게.... ················ 95 김 미 정 | 나 그대의 손과 발이 되어 ················ 100 김 춘 호 | 돌아보니 꽃길이었다 ················ 103 김 현 정 |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 109 윤 정 문 | 나만의 길 ················ 113 한 선 자 | 장애를 향해 달리다 ················ 118 이 수 현 | 보통의 행복 ················ 122 가 족 상 김 미 애 | 내겐 수호천사 같은 나의 가족
················ 128 김 미 옥 | 춤추는 아이! 사랑스런 근재! ················ 131 박 영 실 | 내가 살아가는 이유? ················ 134 양 윤 정 |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 137 양 인 재 | 꿈을 향해 날개짓을 멈추지 않는 다운 친구 ················ 143 윤 예 원 | 늦게 피는 꽃 ················ 151 조 민 숙 | 우리 가족의 평범한 일상 ················ 156 조 진 희 | 그들에게 퀘렌시아를 ················ 160 차 진 환 | 자작곡으로 노래하는 ‘우리 가족 행복 스토리’ ················ 165 최 광 열 | 네 번의 아픔과 다섯 번의 기적 ················ 169 대상 김예빈님 가족 (행복은 우리가 만드는 것) 7 대상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행복은 우리가 만드는 것 김예빈님 가족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한림성심대학교에 재학 중인 치위생과 2학년 김예빈입니다.우선 장애인 가족 행복 페스티벌을 통해 저희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쁩니다.
지금부터 평범하지만 특별한 저희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 습니다. 먼저 제가 정말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1967년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가 2살 때 지금의 코로나처럼 그 당시에도 열병으로 홍역, 수두 등 이러한 바이러스들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소아 마비 바이러스로 인하여 저희 어머니는 장애 1급이라는 진단을 받고 48년째 목발을 짚고 다니십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때 운동회를 하면 항상 다른 친구들은 엄마와 손을 잡고 달리기를 뛰었지만 저는 항상 할머니와 출전을 하곤 했습니다. 어떤 날은 처음 본 아주머니와 참여한 적도 있었죠. 그럴 때마다 주변 친구들은 어머니의 목발 짚은 모습을 보고 저에게 와서 많은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아이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처음엔 어머니를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학교에서 공개 수업 때문에 부모님을 모셔 오라고 했는데 일부러 어머니께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 척 나중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어머니는 그때 당시 공개수업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제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께 너무 죄송함과
동시에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 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저를 질책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여러 방면에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8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시지만 항상 자신과 같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과 비장애인 들을 위해 힘쓰십니다. 장애인 인권과 인식에 앞장서시어 강의는 물론 투쟁도 직접 나가시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충과 힘든 일들을 상담해 주시고, 힘을 길러 주시는 일을 하시기에 오히려 비장애인들보다 더 강한 마음과 멋진 가치관의 소유자 이십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저 역시 어려서부터 몸이 불편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가고 그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늘 고민하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지역아동센터를 다니면서 만나게 된 많은 사회복지사 분들도 저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지금은 정말 가족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기억에 남고 행복했던 추억들엔 항상 어머니를 통해 인연이 닿은 사회복지사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사회복지사 분들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봉사
활동을 자주 나가기도 하고 할 때는 힘들지만 항상 하고 나면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작년에 했던 멘토링 활동이 저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멘티는 초등학교 4학년에 생각보다 밝은 아이였습니다.일주일에 한 번씩 멘티의 집에 가서 학습을 도와주다 보니 멘티의 부모님과 마주 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멘티의 아버지는 저희 어머니처럼 다리가 불편하신 장애인 이셨습니다. 그래서 멘티가 혹시 부모님이 장애인이라는 것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가지거나 투정을 부리면 어떤 식으로 공감을 해줘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멘티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이 장애인이라서, 몸이 불편해서 불만을 가지거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부모님을 자랑하고 자신의 부모님이 빨리 낫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멘티의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나이는 어리지만 생각하는 것은 저보다 훨씬 성숙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행복은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걸. 그리고 행복은 어디 9 에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부모님의 아픔을 더
돌아보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멘티의 부모님께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항상 자신보다 멘티를 먼저 생각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어머니도 나를 저렇게 사랑으로 키웠겠구나를 생각하며 어머니께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 습니다. 물론 멘토링을 하면서 힘든 순간도 있고 멘티가 말을 듣지 않을 때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멘티가 저로 인해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뿌듯했습니다. 처음에는 도움을 주러 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오히려 더 제 자신을 돌아보고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든 봉사 활동이 그런 것 같습니다. 저를 항상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성장시킵니다.이번엔 저희 언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언니의 직업은 물리치료사로 현재 춘천에 있는 한 재활의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춘천에서 나름 유명한 병원이다 보니 환자들도 많고 물리치료사분들도 많지만 가장 친절하고 조심스럽게 치료해 주기로 소문난 저희 언니를 가장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언니는 저와 8살 차이가 나서 자주 장난으로 자신이 거의 저를 키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진 첩을 보면 정말 언니가 저를 엎고 있는 사진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막내라는 이유로 옛날부터 언니는 저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습니다. 어머니의 심부름도 매번 빈말 없이 맡아서 하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가 고민이 생겼을 때 항상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조언해 줍니다. 주변에 친구들의 언니를 보면 일명 현실 자매라고 부르는 것처럼 싸우기도 많이 싸우는데 저는 언니와 싸운 적이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없습니다. 사실 싸운 것이 아닌 일방적으로 제가 혼났다고 해야 맞을 것 같네요. 제 주변 사람들은 언니를 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저희 외삼촌은 간경화로 2개월의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며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라곤 오직 이식수술밖에 없다는 것을 듣고 이식을 해줄 공여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10 이모와 아버지, 이모부 등 모두 이식을 해주시고자 검사를 했는데 외삼촌과 맞지 않아서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 언니는 금식 수련회 기간이라 외삼촌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 외삼촌을 살려주세요. 저의 간이 외삼촌과 맞는다면 제가 간을 외삼촌에게 이식할게요.”라고 기도했고 얼마 후 마지막 희망으로 저희 언니가 검사를 한 결과 이식 조건에 딱 맞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18시간의 긴 수술과 가장 힘들고 위험한 간이식 수술을 그 당시 대학교 2학년인 언니가 하게 된 것입니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수술인데 언니는 사랑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마쳤고 지금 언니는 누구보다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우리 가정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항상 남들에게 친절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희 동네 에선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가족을 우선시하고 계단이 있는 어느 곳에서든 항상 어머니를 업어 주십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눈이 올 때는 미끄러질까 봐 늘 업어주시고 계단과 경사로가 없는 곳은 아버지가 편의시설이 되어주셔서 엘리베이터 역할을 해주십니다.어머니의 영향으로 저는 어느 순간부터 어디를 갈 때마다 계단과 경사로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하게 됩니다. 비장애인도 언제 장애인이 될지 모르고 당장 내일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은 모든 기관이나 도로 등 모든 장소에 필요한 필수적인 항목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전엔 어머니가 목발을 짚지 않은 모습을 상상하고 바란 적이 있습니다.물론 좀 더 편하고 저에게도 다른 이미지의 어머니로 생활했겠지만 지금의 저희 가족이 행복한 것은 장애와 비장애의 논리가 아닌 생각의 전환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돈이 많고 건강한 육체를 소유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도 같은 아픔이 있을 때에도 그 고통을 통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긍정적으로 생각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좌절하고 낙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고통의 시간은 더욱 둥지를 틀기에 생각의 전환을 빨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어려서부터 11 부모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더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 지금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유익으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때때로 벅찬 어려움이 찾아와도 우리에겐 힘이 되는 가족이 있기에 결코 고통이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 또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긴장을 놓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전 세계 인구 중에 약 20 퍼센트가 장애인이라고 하는데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로 인해 장애인들이 점점 늘어날 것임을 예상해 봅니다. 인간은 모두
예비 장애인이며 70세, 80세 나이가 들면 모두 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기에 장애인이 내 가족이라 생각한다면 장애인 인식과 차별이란 단어가 무색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산과 들엔 푸르름이 더욱 짙어지는 5월입니다. 늘 푸르른 날만 있을 수 없기에 추운 겨울도 작렬한 햇빛의 여름도 사계절 모두가 필요하기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통해 존중하며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회,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장애인 가족 행복 페스티벌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시간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우수상 배순단님 가족 (잘한다! 잘했다! 배순단!) 성우경님 가족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하재필님 가족 (우리가족에게 훅 들어온 비나리) 13 최우수상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잘한다! 잘했다! 배순단! 배순단님 가족 1. 고향과 가족 ⓛ 나는 선천적인 장애인이다.배 순 단. 나의 이름. 2남 4녀 중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로 태어났다.뭐가 그리 급했는지 다리부터 차고 나오는 바람에 엄마는 죽을 고비를 넘기시고 나는 태어나자마자 장애인이 되었다. 양 손가락은 힘이 없고 두 발끝이 안쪽으로
심하게 휘어 발바닥 바깥쪽 면을 바닥에 딛어 겨우 걷는다. 요즘엔 완치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병명도 몰랐던 그때는 사람들 입소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 낫게 해주려고 전국에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다니 셨다고 한다. 평소 몸이 약한 엄마가 40리가 넘는 먼 길을 혼자도 아닌 나를 업고 매일 새벽에 나서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시골길을 다니셨다니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 다행히 순둥이라 하루 종일 업고 다녀도 칭얼거리지도 않고 때가 되면 포대기를 옆구리에 동여매고 젖을 물려가면서 다녀도 잘 먹고 잘 자고 했 다고 한다. ② 아버지는 산타 우리 아버지는 농사일하며 18년간 동네 이장을 하셨다. 누에도 키우고 사과 농사를 크게 하셨으며 그 시절 잘 알지 못했던 참외, 키위를 재배할 만큼 농사일에서는 앞선 분이셨다. 하지만 농사를 잘 지어도 판로를 찾지 못해 수익을 내지 못했으며 팔지 못한 과일과 채소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팔지 못해서 나눠드린 것인지 아니면 드리려고 한 건 지에 대한 궁금증도 생긴다.이장이라서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많아서라기보다는 없는 것도 필요하다
하시면 사다 주시는 성격이시기 때문이다. 14 ③ 난 할 수 있다.어느 날 동네 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홀치기를(묶어서 염색하는 기술) 하는 것을 보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 하고 싶었지만 양손이 불편한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동네 언니들 중에는 내가 봐도 들쭉날쭉 엉망인 사람도 있었으며 나는 작은 언니를 붙들고 하고 싶다며 떼를 썼다. 동생의 성화에 언니가 자기 자리를 내주며 가르쳐 주었고 나는 보란 듯이 해냈다. 양손 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주먹조차 쥐지 못하는 내가 깨알처럼 고르게 잘하니 모두 깜짝 놀라 했으며 난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고 그런 날 언니가 뿌듯해하며 바라 봐주던 기억이 난다. ④ 학창시절 난 학창시절이 없다. 난 학창시절을 모른다. 불편한 몸으로 태어나 언니, 오빠, 동생이 학교를 가도 난 단 한 번도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부러운 적도 없었다. 난 당연히 못 가는 곳? 내가 가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다. 15세가 되던 해인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동생이 소풍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나도 소풍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번 한 것 같긴 하다. 바보처럼 친구들이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 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왜 난 학교를 갈 생각을 못 했는지 참 무지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리 집은 과수원을 해서 동네에서 좀 떨어진 외딴곳이었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왕복 2시간가량으로 그때의 내 걸음으로 갔다면 더 많은 걸렸을 것이며 보내준다고 해도 가지도 못 했을 거리이다.2. 가족의 탄생 ① 남편과의 첫 만남 내 나이 22살이 되던 해!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한 친구가 다가와 “너 시집간다며?” 라고 하는 것이었다. 친구의 장난으로만 생각했는데 친구가 집에 사주단자가 왔을 거라며 확인해보라고 했다. 깜짝 놀란 난 곧장 집으로 가서 “나 시집 가?” 엄마에게 물었다.엄마는 아니라고 했으며 난 엄마의 말을 믿었다. 그렇게 며칠 뒤 난 장롱 속에 15 빨간 보자기를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자기를 열어보았으며 그건 바로 사주단자였다. 난 너무 화가 나 시집 안 간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갈 곳이 없는 난 동네 어귀 정자나무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빠가 집에 가자며 찾아오셨고 그런 아빠를 붙들고 난 “시집가면 3일만 있다가 다시 집에 올
거야”라고 화를 냈다.하지만 이미 시집간 언니들은 내게 시집은 가야 하는 거라고 계속 설득했으며 나는 내 몸도 성치 못한데 시집가서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낳고 한다는 게 상상 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시집간 큰언니가 시내에서 보자고 했으며 그렇게 나간 자리엔 예비 시어머님과 남편이 있었고 제대로 된 인사는커녕 패물을 해주신다며 금은방으로 날 데리고 가셨다. 그날 나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묻지도 않았다. ② 토끼 같은 신랑과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1980년 2월 27일, 전통혼례를 치르고 난 결국 시집을 갔다. 내 나이 22살, 남편 31살. 남편은 1남 3녀의 맏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시어머님께서는 귀한 아들을 낫게 하려고 몸에 좋다는 약은 다 사다 먹이셨고, 다행히 더이상 아프지는 않았지만, 부작용으로 지능이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결혼 당시 남편은 장애등급은 없었고, 동네에서도 다 아는 조금 부족한 노총각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아버지 몫까지 일하며 자식들을 키우셨다고 한다. 새벽부터 억척같이 밭일, 논일해 가며 웬만한 남자들 보다 힘도 세고, 술도 잘 잡숫는 어머니.
여장군 같은 느낌의 어머님이셨다. 남편 얼굴도 제대로 한번 쳐다보지 못하고 시집온 난 첫날밤이 되어서야 볼 수 있었 다. 그날이 나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③ 말이 씨가 된 날 시집오기 전 3일만 있다가 다시 집에 온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걸 시어머님이 아셨는지 감자 농사철이라 바쁘다며 친정에 보내주지 않으셨다. 보름이 지날 무렵 시어머님은 음식을 해주시며 날 친정으로 보내주셨다. 친정에 도착할 때 쯤 저 멀리 마을 어귀에 익숙한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빠였다. 난 너무 반가운 16 나머지 달려가 한참을 품에 안겨있었다. 전화도 없이 온 건데 어떻게 알고 나왔 냐고 하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 그때 옆집 아저씨께서 “아이고 딸내미, 아빠 애간장 다 태우고 이제야 오네…. 매일 같이 버스 시간만 되면 오는가 싶어서 정류장에서 기다렸는데….” 그 시절 시집가면 3일 후 친정에 가는데 와야 할 딸이 오지 않으니 어디 도망이라도 간 건 아닌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노심초사하며 매일 버스정류장에서 날 기다린 것이다. 그렇게 날 시집보내려고 애쓰던 아빠는 내가 시집가던 날 구두도 못 신을 정도로 우셨다고 한다. 그런 아빠 때문에라도 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④ 혼자서도 잘해요 손이 불편한 날 위해 부모님께서는 시집갈 때 전기밥솥을 사주셨지만, 시댁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초가집! 그 시절 동네에 전기가 다 들어왔지만, 시어머님은 그 돈 아껴 논, 밭만 사 모으셨다고 한다. 결국, 난 아빠가 몰래 쥐여준 비상금 으로 전기를 넣었으며 그간 어깨너머로 배운 집안 살림을 기억해 가며 집안일을 하였다. 어느 날 웬일로 장을 많이 봐오신 어머님은 일꾼 30명의 밥을 해놓으라는 말만 남기시고 나가셨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머님의 말씀인지라 안 할 수는 없었다. 급한 나머지 난 시집간 언니들을 불러 밥과 국, 반찬을 만들어 내었으며 어찌나 솜씨가 좋았던지 하나같이 맛있다고 칭찬을 하였다. 그 후 난 언니들의 도움 없이도 바쁜 농사철 몇 십 인분의 식사 준비 정도는 혼자서도 척척 하는 살림꾼이 되었으며 그런 날 언니들은 대견해 하면서도 안타깝게 지켜봤다. ⑤ 우리 집 보물/대들보 나의 큰 힘 시집와 살림이 어느 정도 몸에 배어갈 때쯤 첫 아이를 가졌다. 입덧이 너무 심해 밥솥에서 올라오는 김 냄새가 얼마나 역하던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힘들었다. 입덧은 점점 더 심해지고 온종일 물 한잔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게워내는 며느리를 보며 어머님이 돈을 쥐여주면서 친정에 가서 며칠 쉬다 오라고 하셨다.마음 편한 친정이라고 입덧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먹는 게 없다 보니 힘도 없고 입맛은 더 없고 파리가 달려드는데 쫓아내는 것조차 힘들어 모기장을 쳐놓고 일주일 17 내내 누워있었다. 하루는 큰언니가 수박을 한 덩이 사 왔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아빠의 엄호 속에 아무도 주지 않고 혼자서 다 먹을 수 있었다.지금도 수박을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어머님이 날 데리러 와서는 “이제는 가야 하지 않겠냐. 일꾼들 밥은 관두고 식구들 밥만 해라.” 라며 이끌고 나섰다. 입덧으로 밥도 못 먹는 며느리에게 마치 호의를 베풀 듯이 식구들 밥만 하라는 시어머님...... 결국, 엄마, 아빠는 또다시 울며 나를 시댁으로 보내야만 했었으며 시어머니는 나를 집에 데려다 놓고는 그 길로 소를 몰고 일을 나가셨다. ⑥ 아버지의 부재 큰딸이 태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삼칠일도 안 된 터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시어머님은 가라고 하셨다.그길로 바로 친정으로 달려갔으며 무슨 정신에 어떻게 갔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고모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