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황씨와 창원황씨 기원 著者 萬葉 黃鼎普 - 2 - 머리말 이 전자책은 창원황씨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서 창원황씨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수년간 연구한 내용을 소개 합니다.중국의 황국사를 한국으로 가져와 번역하신 황양규 회장님과 골포국은 황씨의 나라인 것을 밝혀내신 박동 박사님의 도움으로 이 글을 쓰게됩니다. - 3 - 황씨의 역사 황씨는 중국고대의 전설 삼황오제부터 시작한다고 하고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전욱고양의 후손이며 6대손 육종이 황씨의 시조라고 하고 있다.나는 이 것을 부정 한다. 육종은 25명의 자식을 낳았고 육종의 25명 자식들에게서 14개의 姓 씨가 생겼다는 것이다.그럼 육종은 황씨의 시조가 아니다.육종에게는 둘째 아들 혜련공이 계셨는데 이분은 풍수지리 지리학에 능하신 분이다. 고대는 항상 홍수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 홍수를 잘막는 사람이 왕이 되고 영웅이된다.혜련공은 중국 요나라시대 요임금의 신하였다. 홍수를 잘막아서 치수의 공을 높이 치하하면 姓을 황씨요 이름을 운(云) 이라 지어 주고 중국 산서성 태원시에 땅을 하사하고 그곳에 나라를 세워주고 黃國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이것이 황씨의 시작이다. 즉 황운공은 세계 모든 황씨의 시조인
것이다.이 기록은 황씨가 중국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 4 - 저자도 연구를 하기전에는 저자도 그렇게 알았다. 한국의 황씨들도 모두 중국에서 온 중국 사람의 후손이라고 알고 있었고 한국황씨의 시조는 서기 28년에 중국에서 온 학사공 황락공이 이라고 알고 있었다. 2024년은 AI를 이용하여 지난 과거나 고대의 기록를 쉽게 검색을 할 수 있어서 비밀이 존재 할 수 없다.중국측에서는 혜련공이 요임금시대의 인물이라고 했지만 요임금이 혜련공에게 하사한 지역은 산서성 태원시 이며, 2300여년경의 일이다.단군왕검께서는 기원전 2333년전에 평양에 도읍을 세우셨다. 평양은 여러곳에 있다. 한곳이 아니다.태원시 아래에 있는 임분시의 옛지명도 평양이다.그렇다면 고조선을 세운 단군께서 기원전 2,333년전에 도읍을 평양에 정하였고 33년뒤에 태원시에 땅을 하사하고 황국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된다.중국에서 말하는 요임금이 바로 단군왕검인 것이다.단군은 동이족이다. 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요임금 다음에 순임금이 나오는데 맹자도 순임금은 동이족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은나라가 있다, 은나라의 수도는 은허이다. 이곳은 하북성의 안양시이다. 그러니까 태원시, 임분시, 안양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고조선의 영역이었고 동이 - 5 - 족의 영역이었다 라는 것을 확인 시켜 준다.황씨는 축융족이요 九夷族 즉 아홉 개의 오랑캐중에 동이족이다. 중국인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황씨들은 중국인이 아닌 것이다.기원전 2300년에 건국된 황국은 요나라 순나라 하나라 은나라 시대를 거쳐 주나라 시대에 들어서서 주나라 효왕시대인 기원전 891년에 주효공이 황운공의 후손인 황희(또는 황석)에게 장강 중류 한수 동쪽인 호북성 의성시에 봉읍을 하사해서 황국을 잇게 했다. 46년후인 기원전 845년에 문후 황맹(또는 황장)이 도읍을 의성시에서 하남성 광주 즉 현재의 황천시로 옴겼다. 의성시는 강과 가까이있어서 홍수의 피해가 많았기 때문에 도읍을 옮긴 것이다.이곳에서 초나라에게 기원전 648년에 멸망 할때까지 황국은 건재 하였다.중국의 역사는 춘추전국시대가 있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30년까지를 춘추시대라고 한다.초나라는 강대한 국가였다. 황국은 이 초나라에 의해 멸망 한 것이다.황씨들은 여러 각지로 흩어졌다. 초나라에 의해서 호북성 무안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를 당했다. 또 다른 사람 - 6 - 들은 살길을 찿아서 바다를 건너서
한반도로도 건너왔다.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황씨 성을 가지고 살아갔다. - 7 - 한반도 황씨의 시조 황경(또는 황경수공)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 이전에 진효왕이 있었다. 진효왕은 부국강병책으로 책사인 상앙(공손 앙)을 기용하여 모든 것은 법에 의한다는 法家의 아주 엄한 제도를 진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이로서 진나라는 강성한나라가 되었고 후일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 하는 계기가 되었다.승상인 황경수 공이 계셨다. 상앙의 法家를 秦나라에서 시행하니 진법이라고 하는데 이 법은 너무 엄격한 법이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엄한 벌을 주는데 태자가 잘못하면 태자의 큰 스승은 코를 베어 버리고 나머지는 얼굴에 인두로 지지는 벌을 주는 엄한 법이었다.승상 황경수공은 진효공은 이런 법의 시행이 백성들을힘들게 하니 이 법을 시행 하지 말라고 간청하였다.그러나 진효공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상앙이 필요했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황경수공은 동생인 황경태, 황경덕 가족을 모두 데리고 산동성 담성현에 사는 서씨 일족인 장인 서선의 도움을 받아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들어 왔다.제물포로 들어왔다는 설이 있으나 당시에는 제물포라는 지명은 없었다. 제물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의 지명이다. 그리고
어디서 정착을 했는지는 아무런 기록이 없 - 8 - 다.한반도에는 황경수, 황경태, 황경덕의 후손들이 살아갔다.그래서 황경수공을 황씨의 大始祖라고 한다.중국의 유튜브에도 그렇게 소개한다.한반도에 황씨가 들어온 시기는 기원전 356년이라는 것이다.그렇다면 한반도의 황씨가 도래한 시기가 기원전 356년이고 시조는 황경수 공이다.그런데 1963년 한국황씨 중앙종친회가 발족하면서 1937년 강원도 최종해 방에서 발간한 동국만생보의 기록을 인용하여 한국황씨는 서기 28년에 후한의 학사로 베트남으로 사신을 가다가 풍랑을 맞아 평해에 표착한 황락공을 시조라고 대대적으로 선전 하였다. 그리고 갑고, 을고, 병고설을 만들어 창원황씨의 시조라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설을 만들어 냈다.황경수공의 증손자 중에는 기원전 314년에 황헐공이 출생하셨다. 한반도에서 출생하신 것이다. 20세에 공부하러 초나라로 들어갔다. 황국을 멸망 시킨 초나라이다. 그라고 호북성 상덕사에서 살았다. 학문을 익혔고, 기원전 273년에 추나라를 침공하려는 진나라를 설복해서 초나라를 이롭게 하였다, 기원전 262년에 초나라 재상이되었다. 큰 공을 세워서 승상에 올랐고 춘신 - 9 - 군에 봉해졌다. 식읍이
14현에 달했다. 당시 여러 제후국에는 유명한 제상이 4명 있었는데 그중 한사람이다. 문하에 식객이 3,000명에 달했고 맹자와 순자도 식객이었다.춘신군은 전국시대에 유명한 4 군자 중의 한사람이다.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춘신군을 중국 활씨의 시조로 받들면서 세계 황씨의 시조라고 한다.그러나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춘신군이 황씨의 시조라고 할 수가 없다. 춘신군은 한반도에서 태어 났으면, 한반도에는 황경수공, 황경태공, 황경덕공의 후손들이 춘신군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기에 춘신군은 한국 황씨의 시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반도로 황씨가 건너온 시기는 기원전 648년 황국의 멸망시 기원전 356년 황경수공의 가족이 한반도로 건너온 시기기원전 223년 초나라가 진나라에게 멸망 한 시기 중국황시의 족보인 화평보, 조주보, 학수보는 기원전 356년 황경수공의 한반도 도래를 기록하고 있다. - 10 - - 11 - 창원의 기원 2024년 창원특례시는 마산, 창원, 진해를 포함하고 있다.기원전 창원의 역사는 창원황씨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한다.한국황씨의 대시조 황경(황경수)공 기원전 356년 황경수공은 동생 황경태, 황경덕공과 한반도로 왔다. 그러나 어디에 정착을 했다는
기록도 없다.그런데 창원,마산, 진해, 김해. 지역에 거북구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무수히 많다. 황씨들이 살았다고 추정하는 지역은 이곳 뿐이다. 창원 마산 김해지역의 龜 자가 들어가는 지명을 살펴보면마산 龜山面. 龜伏, 龜石, 龜尾 창원성산구 三龜洞, 龜현동, 龜谷洞. 龜巖洞. 구지촌 진해 구산성터, 下龜 거제도 蓮龜,金龜 김해 - 12 - 龜山洞, 龜旨峰, 黃山河 양산 黃山津 함안 거북산, 구포리,龜谷,구림들,구곡저수지. 龜頭谷,구성리 元龜城, 南龜 부산 구포동, 구봉산 이를 근거로 황경수 공의 일행은 마산 창원지역으로 내려왔고 그 후손들이 황씨 집성촌을 여기저기 만들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지역에는 骨浦國 또는 彌烏野馬國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 물계자전에 기록하고 있고, 서기 209년에 포상팔국 전쟁에 골포국이 포함되었다, 아라가야인 함안과 전쟁을 했다. 212년에 골포국을 포함한 몇 나라가 신라의 울산을 공격하는 전쟁이 있었다는기록을 하고 .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포상팔국이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골포국은 황씨의 나라였다는 것이다,거북 龜 자와 황씨와의 관계는 거북이 모양에서 누를 黃 자가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중국 바이두를 검색하면 황씨를 검색하면 바로 거북이 형상이 검색된다는 것을 알수 있게 한다. - 13 - 골포국은 기원전 648년 황국이 초나라와 멸망하고 나서 마산만으로 들어온 황씨들에 의해 건국되었거나 기원전 356년에 한반도로 들어오신 황경수공의 가족이 건국하였거나 하여 골포국은 황씨의 나라라는 것이다.한국의 모든 성씨들이 골포국을 자기나라 라는 주장을 하지 못한다. 이유는 아무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창원황씨들은 거북구자가 들어 있는 지명이 근거가 되고, 또 서기42년에 금관가야가 건국되면서 김수로를 모시는 영신가로 불리우는 구지가 龜旨歌를 통하여 김해지역도 골포국의 영역이었음을 확인 시켜 주고 있다.龜何龜何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 머리를 내놓아라 若不現也 만일 내놓지 않는다면 燔灼而喫也 구워서 먹으리 작자·연대 미상의 고대 가요. 또는 라고도 한다. 옛날 가락국 사람들이 왕을 맞기 위해 구지봉에 모여 흙을 파며 불렀다고 전한다. 잡귀를 쫓는 주문, 거북 신에게 왕을 달라고 비는 기원, 영신제의 절차 중 희생무용에서 가창된 노래, 원시인들의 강한 성욕을 표현한 노래 등 학자들마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 14 - 이렇게 구지가를 설명하는 것이
인터넷에 떠 돈다.구지가의 탄생배경을 살펴보자 기원전 150년경, 이치사 선우의 번왕이었던 휴저왕과 혼야왕(昆邪王)이 계속하여 전한에게 패배하자, 그들을 송환하여 사형으로 그 죄를 물으려고 하였다. 혼야왕은 이치사 선우에게 끌려가면 목숨에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휴저왕을 설득하여 전한에 투항하려고 하였다.혼야왕은 휴저왕이 반대하자 그를 죽이고 투항하였으며, 휴저왕의 부인과 두 아들을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주었다. 이 시기가 기원전 120년경이다.곽거병은 휴저왕의 부인 연지(閼氏)와 장남 일제 및 어린 동생 윤(胤)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돌아왔다. 말 기르는 노예가 된 일제의 말은 윤기가 흘렀다. 그래서 한무제에의 눈에 띄였던 것이다. 노예에서 해방되고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시중(侍中),부마도위,광록대부에 올랐다.일제는 망하라(莽何羅) 등의 한무제 암살 시도하려 했는데 막강한 무예로 암살자들을 물리쳤다. 이 공로로공로로 거기장군이 되었고,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이름은 일제이며, 동생은 김윤이다,한무제는 흉노족을 약 3만명가량 잡아와서 산동 지방에 이주 시켰다. - 15 - 김일제가 노예에서 해방되자 동생인 김윤도 노예에서 해방되었다. 한무제는 기원전
87년에 사망을 하면서 어린 아들 소제를 김일제에게 장래를 부탁했다.그래서 김일제의 후손들은 한나라 황실가까이에서 권세를 누렸다.기원전 87년 제7대 황제인 무제가 죽은 후 한나라 조정에서는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겨우 여덟 살이던 태자 유불릉(劉弗陵)이 소제로 황위에 오르자, 곽광(霍光)은 어린 황제를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권을 장악했다.그 후 기원전 74년 소제가 후사 없이 죽자 곽광은 창읍왕 유하(劉賀)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불량한 품행을 이유로 곧 폐위시켰다.유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선제는 곽광이 죽자 곽씨 일족이 쥐고 있던 권력을 되찾기 위해 곽황후의 소생이 아닌 전처 허황후의 소생을 태자로 삼았다.선제가 기원전 49년에 죽자 허황후 소생의 태자가 원제로 등극했다. 원제가 재위 26년 만에 죽자 그의 어린 아들이 성제로 등극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원제의 황후이자 성제의 어머니인 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외척 왕씨 일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외척 왕씨들의 권력은 결국에 서기 8년에 왕망이 스스 - 16 - 로 황제에 올랐다. 왕망의 어머니는 김씨이니 김씨들은 왕망을 도와 함께 부귀영화를 누렸으나,유방의 후손 광무제 유수가
분연히 일어나서 서기 23 년에 왕망을 죽이고 서기25년에 후한을 건국한다.왕망을 죽일 때 왕망편에 섰던 김일제와 김윤의 후손들과 산동지방에 살던 흉노족들을 모두 죽이라는 광무제에 명에 김씨일족은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다.살기 위해서 사방으로 도망을 갔고, 김일제의 동생 김윤의 후손들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도망을 쳤고 그들이 들어 온 곳은 김해 지역이었다. 한두명이 도망친게 아니다. 어떤 설에 의하면 3만명이라 하니 대단히 많은 숫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한반도로 건너 올수는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몇백명의 소수가 한반도로 건너 왔을 것이다.김해로 들어온 지도자는 사천성 청도의 태수를 지낸 김탕이다. 김탕은 왕망이 죽고 그 다음해인 서기 24년에 한반도로 들어왔다가 영토를 확보하려고 김해로 들어 온 것이다.처음에는 영산강을 통하여 나주 지역으로 들어 왔으나 나주지역의 토착 세력들이 흉노족들을 그곳에 정착하게 내버려 두질 않았다. 이곳에서 쫓겨난 흉노족들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살지역을 찿았다.그래서 김해 지역까지 들어 왔는데 당시는 인구가 작은 - 17 - 데 비해 땅은 넓었다. 김해지역에는 그 지역을 통치하던 세력이 있었다. 마산을
중심으로 하던 골포국의 황씨들이 었다.골포국의 영역은 마산만을 중심으로 하여 위로는 낙동강줄기를 따라서 김해의 황산강 서쪽 까지 였다.흉노족들은 나주에서도 쫓겨나서 김해까지 왔는데 김해는 바다도 있고 강도 있으며 토지는 넓어서 살기 좋은 곳이었다.노예로 살아도 살아가게만 해달라고 빌던 흉노족들의 간청에 골포국의 국왕은 그들이 정착하게 해 주었다.그렇게 1년 2년 3년을 살아가면서 흉노족들은 산동에 사는 흉노족들을 점차 김해로 끌여 들엿다.인구가 많아지고 세력이 커졌으며 수년간 농경과 어업을 통하여서 자본이 축척되었다. 김탕은 사천성 청두의 태수였던 자이다. 이런 자가 언제까지 황씨들 밑에서 굽신 거릴 수가 없었다. 세력이 커지자 골포국황씨들의 김해를 빼앗기로 작당하고 골포국의 황씨들에게 싸움을 걸었다.굴러온 돌들이 박힌 돌을 빼내려는 짓거리는 흉노족들에게서 시작이 되었다.전투는 김해의 구지봉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구지봉은 헤발 40여미터 밖에 않되는 나지막한 동산이다.구지봉위에는 골포국의 황씨들이 진을 치고, 구지봉 아래는 흉노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 18 - 지형상에서 동산위에 있는 골포국 황씨들이 유리하였다.나무뒤에 숨어서 활을 쏘아대니 흉노족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에 흉노족들은 산에다가 불을 질러서 골포국 병사들을 산 아래로 내려오게 하여 전투를 벌이려고골포국 병산들에게 산에게 내려와서 싸우지고 하면서구지가 군가를 만들어서 떠들었다. 龜何龜何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 머리를 내놓아라 若不現也 만일 내놓지 않는다면 燔灼而喫也 구워서 먹으리 황씨들아 황씨들아 머리를 내 놓아라 만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나무숲에 숨어 있는 황씨들을 자극하는 노래다.황씨의 토템이 거북이라는 것을 알기에 흉노족들은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황씨들을 자극했다.그래고 산에다 구비봉에다가 불을 질렀다.나무가 불에 타자 연기가 봉루리로 올라왔고 골포국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산에서 내려와서 흉노족들에게항복을 했다. - 19 - 골포국의 중심지역은 마산만이었다. 골포국은 김해지역을 흉노족에게 내 줄 수밖에 없었다.김해의 龜旨峰에서 승리를 거둔 흉노족들은 김탕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김수로라고 이름을 고쳤다. 금관가야의 탄생이다,그리고 가락국이라 했으니 황산강은 가락국의 동쪽의 강이라는 뜻에서 낙동강이라 불리게 되었다. 금관가야의 탄생은 이러한데 김해김씨들은 구지봉 산봉우리에 황금알 6개가 내려 와서 그 알속에서 인간이 태어
났다고 신화를 썼다. 그럼 김해김씨들은 인간이 아니라 조류가 인간으로 둔갑을 했다는 것이다.이렇게 골포국 황씨들은 김해 지역을 빼앗기고 김씨들과 함께 살아갔다.서기 209년 나주지역의 세력과 바다를 끼고 있는 8개의 나라가 아라가야와 전쟁을 해서 함안을 공격했다.그 전쟁에서 포상팔국은 승리를 했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포상팔국이 전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년뒤인 서기 212에 다시 골포국과 몇 개의 나라는 울산을 공격한다. 울산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김해지역을 지나가야 한다. 금관가야는 싸워서 승산이 없을 것인 걸 알고 항복하고 길을 열어 준다.서기 42년에 금관가야에 김해를 빼앗기고 170여만에 흉노족에게 복수를 하고 항복을 받아냈던 것이다. - 20 - 그후 골포국과 금관가야는 평화롭게 살았다. 골포국은 마산만을 통하여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에서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였다.상당한 인구가 일본열도로 이동하여 살았을 것이다.특히 골포국 국민은 마산만에서 가까운 일본 열도로건너가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된다. 서기 390년 광개토 대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응신 왕은 백성들을 데리고 일본 열도로 건너간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야마토 정권를
세운다.그보다 앞서서 일본에는 무슨 천황이니 그런게 있다. 골포국의 황씨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정권을 세운 것 같다.이 근거는 창원특례시 홈페이지에는 서기 300년경에 골로국이 망하고 탁순국이 생겼으며 서기 540년경 탁순국이 신라에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없는 탁순국이 등장한다. 바로 골포국 백성들이 건너가서 골포국을 탁순국이라 불렀지 골포국이 망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골포국은 신라에 의해 망하고 골포국 백성들은창원 마산 지역을 떠나 중국으로 일본 으로 건너 갔다가고 본다. 남은 사람들은 신라의 노예로 살았다.탁순국이란 명칭은 일본서기를 인용한 것인데,탁순국은 일본서기 신공왕후 46년조에 탁순왕 말금한기가 등장하면서 나온다. - 21 - 신공 49년조에도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공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라 7국의 이름이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같은 시기 나라 이름을 골포국 이라 했으므로 창원시청에서 골포국이 멸망했다고 한것은 잘못이다. 나라 이름은 도시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므로 부르는 주체마다 달리 부를 수 있다. 예를들어 나주 월지국은 발라국, 보라국 등 여러가지로
불리웠다.거북이 龜字를 중국인들은 우구웨이 라고 발음한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거북이를 보면 왕바단이다라는 것을 연상한다.왕바단은 욕이다. 기생집의 기둥서방과 기생사이에 낳은 것을 왕바단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가 왕바단이다.蛋이란 알을 뜻하니 새끼라는 말이다.이 유래가 전해 진 것은 원나라시대에 기생집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녹색 모자를 썼다. 녹색모자는 바다속에서 사는 거북이의 등가죽에 풀들이 자라서 거북이가 푸른색 모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기생집 남자들이 써는 모자라는 이유로 왕바라 하고 그 아이를 왕바단이라 한다.그러나 황씨들의 거북이는 녹색이 아니라 황금색이다.그래서 황금 거북이가 우리 황씨의 토템인 것이다. - 22 - 중국 발음으로는 후와앙 우구웨이 이렇게 발음한다.창원황씨는 골포국의 후손들이다. 신라는 문무왕 16년 676년 삼국통일을 하고 마산을 굴포군, 창원을 굴자군이라고 명칭을 부여 했다.경덕왕 16년 757년 굴포군은 합포군으로 굴자군는 의안군으로 개칭했다. 서기 918년 왕건은 고려를 개국했다. 1018년현종 9년 의안군과 합포현, 웅신현이 금주 지금의 김해에 소속되다. 1160년경 창원황씨 휘 량충께서
출생하시었다.고려는 거란군의 3차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장수들은 전공을 세웠으나 문신들에 비해서 바른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무신인 강조의 난이 일어 났고, 최질의 난이 일어났다. 무신들의 난은 평정 되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문신인 감강찬이 귀주대첩을 승리를 이끌었다. 그 후 문신들은 무신들을 점차 홀대하여 무신들은 불만이 쌓여갔다. 의종4년인 1270년 의종은 흥왕사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술이 취해서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렸다. 이에 분노한 정중부 이의방등은 무신의 난을 일으켰다.무신들은 정권을 차지하고 1270년까지 100년간 무신들이 권역을 휘둘럿다.무술을 잘하여야 출세를 한다, - 23 - 창원황씨 호장공파의 탄생 이런 시기에 창원황씨 휘 량충께서는 1160년경에 태어 나셔서 성장하시면서 세상을 배우셨다.휘 량충의 아버지도 계셨고 할아버지도 계셨다, 그분들은 골포국이 망한 후에도 그곳에 살고 계셖던 분들의 후손이다. 상당한 토지도 가지고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호족은 아니었다, 호족은 신라시대부터 있었고 호장도 신라시대부터 있었다. 세상이 뒤바뀌고 무장들의 시대였으니 무술을 잘하면 출세의 길이 열릴 수가
있었다.휘 량충께서 출생하신 의안군 지역에도 거북구자가 들어가는 황씨들의 집성촌들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마산지역에도 그러 했다.무장들이 힘을 쓰던 시기였던 것이다. 의안군에도 호족과 호장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휘 량충께서 쟁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창원황씨 호장공파의 시조가 되신 것이고 족보에 기록되는 역사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또 굴포군 지역에도 동촌황씨라고 불리우는 황씨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 황존우라는 분이 호장이되셨다.호장은 세습되어 2세가 호장 황윤정이시고 3세는 검교대장군을 지내신 황한우이시다.호장의 가문이셨기에 3세 황한우께서도 그 지역의 지도 - 24 - 자이셨기에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지휘를 하였기에 금교대장군이 되신 것이다. 의안군과 굴포군에서 즉 골포국이 있던 영역 전체에서 황씨들이 호족이 되고 호장이 되었다. 휘 량충께서는 호장 중에서도 매년초에 개성으로 올라가서 고려황제에게 숙배를 드리는 권한을 가진 정조 호장이 되시었다.호장은 세습되는 직위였기에 아드님이신 2세 휘 양돈께서도 정조 호장이 되셔서 의안군에 개성을 오고가시면서 개성의 군벌들이나 관료들과 친교를 쌓으셨다. 3세조 휘 석주께서는 동촌황씨 황우룡의 여식과 혼인을 하시었다.
의안군과 합포군의 양 가문이 합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로서 더욱 황씨들은 위세가 올라갔고 大相이되시었다. 대상공께서는 아들을 여러명 두셨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시중공파와 공희공파, 상주황씨가 창원황씨 호장공의 후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중 1245년경 출생하신 휘 영렬를 동촌황싸 검교대장군의 여식과 혼인을 시키시었다.검교대장군은 국가에 공로가 있어야 부여되는 직책이었다. 창원마산지역은 항상 왜구들의 출몰이 잦은 지역이기에 왜구들을 격퇴시킨 공으로 검교대장군이 되셨거나 어쨌건 전투에서 공을 세워서 검교대장군이 되셨다. - 25 - 두가문이 혼사를 맺어서 출생하신 분이 4세 휘 영렬 이시다. 4세 휘 영렬께서는 증조부외 외증조부가 모두호족의 집안 호장 이신 것이다. 두 가문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 이셨겠는가? - 26 - 개성 시대 이를 바탕으로 4세 휘 영렬께서는 개성으로 올라가서 응양군소속 무관이 되셨던 것이다. 그리고 거처를 개성으로 옮겼다.무관이셨기에 무관들과는 아시는 분이 많앗을 것이다.그중 의창공씨인 공유 孔楡 장군을 알게되셨다고 본다.공유장군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받았을때 몽고와 끝까지 항쟁하는 삼별초부대가 있었는데 고려조정으로
부터 삼별초를 토벌하라고 명을 받은 장군이다. 그러나 삼별초의 토벌은 쉽지 않았다. 장군의 가문 공천기의 여식과 5세 휘 유께서 혼사를 맺은 것이다.우리가문은 의안군을 떠나 개성에 올라와서 개성의 중앙관직에 있는 가문과 최초로 혼사가 이루워진 것이다.그리고 5세 휘 유께서 출생하신다.휘 유께서는 1308년에 과거시험을 보아서 급제하여 그 사실이 등재되었으나 그해 충렬왕이 붕어하고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는 상당히 복잡한 정치 상황이어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관리로 등용를 시키지 못하였다. 5세조 휘 유께서는 아들을 진신, 진백을 두시고 최유안에게 출가한 따님과 권적에게 출가한 따님을 두셨다.이중 막내딸은 권적의 계실로 출가를 하였다.권적 안동권씨 호는 계정 으로 길창군이고 시호 원정이다. 충혜왕의 심복이었다. - 27 - 충혜왕 2년 1332년에 판전객사사로 충혜왕을 모시던중 충혜왕이 폐위되고 1년만에 충혜왕은 폐위되고 충혜왕의 아버지 다시 충숙왕이 복위하였다. 그러자 충혜왕을 잘못 보필했다면서 8년간 섬으로 유배를 시켰다. 1339년 충숙왕이 승하하자 충헤왕이 복위되자 첨의부 참리를 거쳐 첨의부 찬성사가 되고 화산군花山君 에 봉해졌다. 1361년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쳐들어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