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폴리오 목록

족보해설서

외부 플립북 뷰어

플립북 열기

https://ebooknara.com/ebook/20220208/01

이 사례처럼 전자책 플립북을 제작하세요

누적 1,500+ 제작 · 260만+ 열람 · 영업일 24시간 내 무료 견적 회신

1분 만에 무료 견적 받기

본문 내용

족보해설서 창원황씨 호장공파 창원황씨 호장공파 족보 해설서 서 설 족보가 1527년 발간된지 50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문으로 기록된 족보가 11차례나 발간되어 왔기에 한글세대에 태어난 후손들은 누구나 쉽게 족보를 읽어 볼 수 없었고 이해하기 어려워서 족 보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책인양 치부되어서 선조 들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가르치는데 장애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에 족보를 새로이 한글판으로 발간함을 계기로 쉽게 풀이하여 누구나 족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족보 해설서를 덧 붙입니다 `목 차 목 차 ▷ 서 설 ▷ 서 설 ▷ 최초의 족보발간 ▷ 족보해설 ▷ 1세 의안군 정조호장 황량충 F 호장과 향리에 대한 설명 ▷ 2세 의안군정조호장 황양돈 ▷ 3세 대상 황석주 ▷ 4세 증 응양군상호군 군부판서 황영렬 ▷ 5세 중현대부전객령좌사인,동래부사 황 유 F 1308년 과거급제후 1331년 본직 제수받은 이유는 사위 권적이 있 었기에 가능했음을 밝힘 F 충혜왕과 안동권씨 권적(權適) ▷ 6세 침원서령 황진백 ▷ 7세 신호위정용중랑장 황승후 F 공민왕과 6촌 동서(부인 죽주 안씨 공민왕 정비와 6촌 자매) ▷ 8세 연일감무 황처중 F 1408년 정도전이 죽자

조선조정에 들어가 연일감무 ▷ 4대옥당가 ▷ 왕족과의 관계 영의정 사위 ▷ 후 기 최초 족보의 발간 창원황씨는 서기 28년에 중국 후한 광무제떼 월남 으로 사신을 가시다가 풍랑을 맞아 경상북도 울진 군 평해 월송리에 표착하여 세거하신 학사공 황락 의 후손으로 창원지역에 정작하신 황병고공을 창원황씨 시조라고 불리웠습니다.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 인지는 알수가 없으나 신 라 시대입니다. 그후 창원지역에서 후손들은 번성하였고 고려시대 에 들어서면서 평민집안에서 그 지역의 지배층인 호족으로서 호장층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시기는 1200년초경으로 추정되며 대표적인 호장 은 황량충, 황존우,황우룡이었습니다. 황씨문중에서 호장층이 출현하자 선대를 기록하는 가첩이 쓰여지게 되었고 족보가 후손들에게 전해 지게 되었습니다. 창원황씨 호장공파의 족보는 1세 황량충으로부터 기록되어 왔으나 4세 황영열께서 창원을 떠나 개성으로 진출하여 관직에 있었고 5세, 6세, 7세, 8세, 9세까지 개성 에서 출생하면서 창원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족보 를 가질 수가 없었으며, 7세 중랑장공 황승후께서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고려왕실의 충신 집안으로서 목슴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가족을 데리고 경상북도 봉화군 두문리로 내려와 서 정착한 후에도 문중에 족보는 없었습니다. 조선 중종때 우찬성을 지낸 용헌공 12세 황사우께 서 1519년 경상도 도사로 발령을 받고 창원을 순 회 할때 창원황씨가 경상도 도사로 온데 대해 창 원지역의 일족들은 반가워했지만 이들과 어떤 관 계인지를 따져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족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족보를 구하 였지만 공희공파 (중시조 황석기)의 족보는 알수가 없는 족보였고 1519년 11월 25일 창원황씨 황원 (黃元)으로 부터 족보(중시조 1세 정조호장 황량 충)를 받았지만 이 또한 가족관계를 밝힐 수 없었 습니다. 이때 용헌공께서는 춘추가 34세이었지만 집안에 족보도 없었고 부친으로부터도 6세조까지만 이야 기를 듣고 그 이상 선조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 지 못했기 때문에 창원황씨의 족보를 봐도 가족관 계를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524년 11세 증직 좌찬성 황희성께서 세상을 뜨시 자 용헌공께서는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서 거묵골 (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산95번지)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시던 중 1526년 할아버 지가 사셨던 경북영주시 단산면 병산리에 있는 사 당을 들렀다가 사당

벽장에서 목궤를 발견하고 그 목궤를 열어 보니 증조부이신 봉례공 9세 황전께 서 기록해 두신 가첩을 발견하였습니다. 가첩에 기록된 내용과 7년전에 창원에서 황원으로 부터 얻어온 족보에 3세조의 함자가 같음을 확인 하고 손벽을 치면서 일치됨을 기뻐 하며 족보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3년상을 마치고 세자(후일 인 종)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보덕으로 재직하던 1527 년 1월에 족보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짧은 기간에 창원을 오고가면 서 창원황씨 전체를 찿아서 족보에 전부 싣기에 는 거리가 멀고 인력도 부족한 관계로 인해 창원 에서 가져온 족보에 실린 황원의 선대까지는 싣기 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세 정조호장 황량충, 2세 정조호장 황량 돈, 3세 대상 황석주, 4세 증직 응양군 상호군 이 하 직계만을 기록한 족보를 편수하면서 우리문중 의 최초 족보가 만들어 졌습니다. 족보를 건네준 황원의 일족까지 수록한 완벽한 족 보는 아니었지만 우리문중에서 최초로 발간된 족 보 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의 중요한 점은 창원황씨 황원에 대한 기록이 호장공파나 시중공파나 공희공파등 어느 족보에도 그 이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황원이 건네준 창원황씨 족보에는 황원이

란 이름이 있었으나 그어느 곳에도 황원의 이름 이 없지만 1세 황량충, 2세 황양돈, 3세 황석주의 이름이 존재 했다는 것입니다. 용헌공께서는 경상도 도사시절의 일기인 재영남일 기를 남기셨는데 그 일기에 족보의 취득경위를 소 상히 기록해 주셨기에 거짓이 아님에도 황원이란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서 자손들의 갈래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기에 각기 다른 가첩수준의 족 보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이 족보는 호장 황존우, 황우룡의 이름이 실린 족 보였습니다. 이 두분의 이름은 시중공파 족보도 참고가 되었기 에 세분의 호장이 있었고 호장공파는 3명이다 라 는 기록이 전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시중공파에서 족보를 만들때 또 다른 직계 만을 기록하여 전해졌기에 황원의 이름은 누락된 것이며, 황존우와 황우룡의 이름이 기록된 족보도 찿을 수 없는 점을 감안하면 용헌공께서 편수하신 족보는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 다는 것입니다. 공희공파족보상으로는 시조 황석 기는 호장공파의 6세와 같은 시대인물이기에 창원 황씨가 누구로 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밝힐 수가 없 습니다. 시중공파 족보는 1978년 여러명이 모여 서 여러 족보를 모아서 이렇게 하자며 족보를 탄

생 시키는 과정에서 실로 황당한 결정을 했습니 다. 창원황씨 시조는 분명히 황병고 공임에도 시종공파 시조는 고려개국공신 유금필의 양딸을 배필로 맞은 황충준이며 문하시중을 했다는 족 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래서 창원황씨가 어디 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 습니다. 이상이 창원황씨 호장공파의 최초 족보 발 간 경위입니다 ▷ 족보 해설 창원황씨 호장공파의 족보는 1세부터 9세까지 출 생년도와 사망년도가 기록이 되어 있지않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년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족보는 11차례 발간되었지만 1527년 정해보, 1607 년 정미보, 1706년 을사보는 찿을 수가 없어서 그 기록을 전혀 알수가 없습니다. 1756년 발간된 병자보부터 그 이후만 보유하고 있 어서 이를 중심으로 해석을 합니다. 1308년 5세 황유(黃裕)께서 충렬왕때 과거에 응시 하여 합격하여 등과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출생 년도를 추정하며, 1세대를 25년~ 30년으로 가정하니 1세조의 출생 년대가 1160년경이 추정되었습니다. 족보해설은 1세 부터 9세까지만 해설을 하며 그 이후는 족보에 기록된 내용을 보시면서 이해 하시기 바랍 니다. 1세 의안군 정조호장 황량충

1160년경출생 추정 창원지명 유래 : 신라시대 의안군이 고려시대 의창현과 회원현으로 개칭괴었다가 1408년 창원군으로 개칭되었는바, 1160년경에는 의안군이었기에 의안군정조호장을 지내심. 호장((戶長)이란 호장의 전신은 통일신라시대 지방의 지배층인 호족이나 촌주(村主)로 생각된다. 신라말에 이들은 중앙의 상대등(上大等) 이하의 관제를 본따서 당대등(堂大等)·창정(倉正)·병정(兵正) 등의 직제를 구성했다. 고려 건국 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향리제도도 점차 정비하여 983년(성종 2년) 당대등을 호장으로 개칭했다. 1018년(현종 9년) 향리의 공복(公服)제도와 군현의 인구 수에 따라 향리의 정원을 정했는데, 이때 호장은 주부군현이 1,000정(丁) 이상일 경우 8명, 500정 이상은 7명, 300정 이상은 5명, 100정 이하는 4명이었고 양계지방이 1,000정 이상은 6명, 100정 이상은 4명, 100정 이하는 2명이었다. 다른 향리에 비해 상당히 많은 수였는데, 이는 호장층을 구성하는 기존의 지방세력을 인정하는 대신 그 지역을 한 사람의 향리가 지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향리의 임명방식은 지방관이 후보자 가운데 호장경력을 고려하여

상서성(尙書省)에 추천하면 상서성에서 승인하여 첩(貼)을 발급하도록 했다. 추천시 무작위로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가문과 지방의 관례를 참작하여 임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1051년(문종 5) 향리의 승진법을 정하여 말단 향리에서 호장까지 차례로 승진하도록 정했으나,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즉 같은 향리라도 호장층과 하급향리층은 신분적인 격차가 분명하여, 조선 후기까지도 향리가문의 명단을 별도로 보관하여, 가문의 격을 3단(壇)으로 엄격히 구분해놓고 승진할 때 반드시 가문의 격에 따르도록 했다. 호장층에 속한 가문출신자들은 대개 장교·기관(記官)·창정(倉正)·호정(戶正) 등 향리 상층직으로부터 향리직을 시작했다. 결혼도 이들 가문끼리만 했으며, 하급향리나 서얼과 결혼하면 이 명부에서 삭제했다. 따라서 호장직은 소수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되었다. 이들은 지방의 최고 지배계층으로 과거에도 응시할 수 있었고, 지방군인 주현일품군(州縣一品軍)의 지휘관이 되었다. 따라서 호장층은 고려시대 중앙관료의 공급원이기도 했다. 상경종사(上京從仕)한 중앙관료와 지방의 명문가는 호장가문에서 나왔으며, 조선 초기의 사대부 가문도 조상은 거의가 호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족과 향리의 분화가 촉진되는 과정에서 호장은 공복이 실무담당자인 기관(記官)의 것과 같아지는 등 지위가 격하되어 양반지배층인 사대부가와 구별되기 시작했다. 이에 후기에는 호장의 업무가 6방(六房) 체제 속에 흡수되기에 이르렀다. 호장에는 섭호장(攝戶長)·권지호장(權知戶長)·수호장(首戶 長) 등 여러 직종이 있었다. 섭호장과 권지호장은 임시호장으로 비슷한 관계로 보이며, 수호장은 호장 중에서 대표격인 사람으로 상호장(上戶長)·두호장(頭戶長)이라고도 했다. 수호장은 전임 수호장과 호장들이 모여 선출했는데, 보통 1년 임기이며 재임·3임할 수도 있었다. 안일호장(安逸戶長)은 호장으로 70세 이상 된 사람에게 주는 칭호로 치사호장(致仕戶長) 이라고도 했다. 고려시대의 호장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屬縣)에서는 그곳의 행정을 전담했으며, 수령이 파견된 주현에서도 부세·역(役)·호구 등의 문제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도 수령의 유고시 수령의 역할을 대행하며 민호를 총괄하고, 관용공물의 조달을 주관했다. 특히 관노비는 호장이 관리했기 때문에 관노비의 재주(財主)로서 등기되었다. 호장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매년 정초에 상경하여 왕에게

하례하는 것인데, 이를 담당한 사람을 정조호장(正朝戶長)이라고 했다. 이외에 왕실의 경사, 국상(國喪), 국혼(國婚) 등이 있을 때마다 상경하여 경재소(京在所)에 예물을 바쳤다. 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직접 지방의 사정을 묻기도 했지만 16세기 이후 속현 호장의 상경은 폐지되었다. 이어 1051년(문종 5) 향리의 승진 규정에 따른 9단계의 서열이 정해지자, 호장은 그 최고위직이 되었다. 한편, 호장은 호구장적의 관장 및 전세와 공물의 징수 상납, 역역을 동원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외에 이들은 궁과로 시험을 보아 주현일품군의 별장에 임명되는 등 지방 군사 조직의 장교가 되어 주현군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호장은 대체로 직이 세습되었고, 같은 신분 간에 통혼이 이루어졌다. 또한, 자손에게는 지방 교육의 기회와 더불어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이를 통한 중앙 관료 진출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고려 후기에 호장층은 무반직, 기술직,잡과와 첨설직, 동정직 등 실제 직무가 없는 품관직에 나아가 신분 상승을 꾀하였다. 호장은 향리제도의 직급이다. 1051년(문종 5) 10월에는 향리의 승진규정을 정하였다. 주·현의 향리는 초직(初職)은 후단사(後壇史),

2단계는 병사·창사, 3단계는 주·부·군·현의 사, 4단계는 부병정·창정, 5단계는 부호정, 6단계는 호정, 7단계는 병정·창정, 8단계는 부호장, 9단계는 호장이 될 수 있었다. 공수정(公須正)·식록정(食祿正)은 호정에 준했고, 그 부정은 부병정·부창정에 준했으며, 객사정(客舍正)·약점정(藥店正)·사옥정(司獄正) 은 부호정에 준했고, 부정은 주·부·군·현의 사에 준하였다. 위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호장은 향리중에서 가장 높은직책이었으며 1세조께서는 매년 초 개성의 고려왕궁에 올라가 숙배를 드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정조호장을 지내셨다. 의안군에서 개성까지 올라갔다가 왕에게 숙배만 드리고 내려 왔겠는가 개성에 있는 고관대작들 과도 연줄을 놓으려는 노력을 하시면서 개성거주 세력가들과의 교분도 쌓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니까 평민의 집안에서 향리중의 가장 높은 호장이되었기에 집안을 일으키신 분은 1세조 정조호장 황량충이시며 1세조께서는 우리문중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셨다는 중요한 사실 때문에 1세조 이전에도 선조가 계셨 으나 중시조로 모시면서 족보에 1세조로 기록 되었다. 그리고 우리문중의 족보는 만들어 지게 되었다. 2세조 의안군 정조호장

황양돈 1190년경 출생추정 호장의 직위는 세습되었다. 1세조께서 호장의 반열에 오르셨으니 의안지역의 토로세력 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정조호장직위를 세습하여 신년하례를 하는 권한을 가졌으니 수십년을 반복 하다보면 자연히 개성의 중앙관료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고 의안군지역에서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3세 대상 황석주 1215년경 출생추정 대상(大相)은 ‘대상(大常)’‘태상(太相)’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처음 실시된 것은 904년궁예(弓裔)가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면서 관제를 개혁할 때부터이다. 이 때 마진의 관계는 모두 9등급이었는데 대상은 3위에 해당되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마진의 관계를 국초에 그대로 답습하여 문관·무관의 공적 질서체계를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936년(태조 19) 후삼국통일을 전후하여 16등급으로 재편성하였다. 대상은 이 때 7위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광종 때 중국식 관계인 문산계(文散階)가 유입되면서부터 고려의 관계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즉, 중앙의 관인에게는 문산계가 수여되고 종래의 관계는 지방호족들을 대상으로 하여 수여되었다. 또한, 995년(성종 14) 무산계(武散階)의 실시와 함께 종래의 관계는 폐지되고

문산계·무산계와 향직체계로 제도화되었다. 대상은 이 때 향직체계에 흡수되어 16위계의 향직 가운데 품계는 제4품의 상(上)으로 제7위에 해당되었다. 이 때의 대상은 1076년(문종 30)의 전시과 규정에 의하면 제12과로 전(田) 40결, 시(柴) 10결이 지급된 것을 알 수 있다. 대상이란 995년 이전에는 중앙관직의 종2품 금자흥록대부였다. 995년 이후는 지방 향직의 하나였다. 향직이란 향리의 다른 말이다. 3세조께서는 부친과 할아버지께서 의안지역에서 정조호장을 지내시는 토호세력이기에 향직체계 의 4품인 대상에 까지 오르셨지만 중앙관직이 아니라 지방향직의 품계였다. 대상이 호장과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히 설명하는 것을 찿을 수 없으나 향직도 작은 고을의 향직과 큰 고을의 향직의 차이는 있었다고 볼때 1,2세조의 호장보 다는 상위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 대상(大相)이란 품계를 조선조에 들어와서 1527년 족보를 만든 이후에 후손들은 고려의 종2품 금자흥록대부로 해석하였다. 향직4품이라고 하지 않고 과대포장을 하여 급기야는 문중명칭을 대상공파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 기록은 13세 송간공 황응규께서 1541년 대제 학 신광한에게 아버지이신 용헌공의 묘갈명을

싸 달라고 간청할때 문중 자료를 신광한에게 주었고 신광한은 그를 근거로 묘갈명을 기록했는데 황석주는 정승에 이르렀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기록함은 대상이 지방향직4품이라는 것을 감추기위해서 고려의 중앙관직 종2품이었다는 것으로 기록하게 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14세 정익공 황섬께서는 시발어대상공만만연연(始發於 大相公 漫漫延延) 대상공으로부터 시작하여 덩쿨이뻗어 나갔다라고 기록하심으로서 3세조께서 시조인것처럼 기록해 두셨다. 종2품 금자흥록대부를 하셨다고 설명하신 것이고 향직4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1607년 족보 발문에 그리 기록하신 것은 할아버지이신 12세 용헌공께서 족보에 분명히 1세 정조호장 황량충, 2세 정조호장 황양돈이라고 기록해 두심을 간과하고, 당시 호장은 향리 아전이었기에 이전을 1세조로 내세우기가 부끄러우셨기에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를 근거로 1756년 판관공파 18세 황재동은 병자보를 발간하면서 부록에 기록하길 이전의 족보에 1,2세조의 기록이 3세조의 옆에 기록되어 있어서 자손된 도리로 그러면 않되겠다고 판단하여 상단에 올려 놓는다 라는 주석을 달으면서 1세 황양충, 2세 황양돈 ,시조 3세 황석주

이렇게 족보를 발간 하였다. 또한 1703년 시중공파에서 족보를 만들면서 창원황씨 시중공파라고 호칭하니 시중공파의 족보에 기록된 1690년 시중공파 외손 영의정 남구만이 창원 적현산의 8위묘가 창원황씨 세장묘라는 비석을 세웠고, 전답과 위토가 얼마였으며 등등의 시중공파의 족보를 베껴서 3세조의 족보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후부터는 우리문중도 종2품 금자흥록 대부 대상을 지냈으니 대상공파라고 일족에게 가르쳐왔다. 1878년 족보부터 3세조족보에 시조라는 기록이 빠져있고 1세 정조호장 황량충, 2세 정조호장 황양돈 3세 대상 황석주라고 기록되어 1888년, 1930년, 1956년, 1965년, 1984년, 2004년 족보를 발간하면서 1세 정조호장 황량충이라 기록하였기에 이 족보를 타인들이 보고, 우리문중을 창원황씨 호장공계, 호장공파라고 지칭하는데도, 2022년 아직까지 우리 스스로 대상공파라고 하면서 정체성의 혼란때문에 1세조 정조호장 황량충의 제단도 사당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1세조의 사당과 제단을 세우지 못한 것은 3세조 대상공을 시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3세조의 제단과 사당이라도 세울 것인데 그러하지 못하는 것은 1세조가 엄연히 계시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 잡으려면 1세조 정조호장 황량충의 제단과 사당을 건립하고 문중명칭을 호장공파라고 지징해야한다. 4세 증 응양군상호군 군부판서 황영렬 1245년경 출생추정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에 증직된 것은 아드님이신 5세 황 유께서 전객령과 동래부사를 지내셨기때문에 증직이 되신 것이다. 증직은 아들의 관직이 높으면 아버지는 같은 관직으로 할아버지는 한등급 낮은 관직으로 증직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아드님이 문관이라면 부친의 증직도 문관직을 제수하여야 하는데 왜 무관직을 수여 하였을까? 이에 대한 근거는 없지만 4세조께서는 무관 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는 무신의 난 이후 무관들이 세력을 떨칠 때라서 문관 보다는 무관들이 출세할 때이며, 창원지역은 왜적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의 특성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 무술을 잘하여야 했고, 선조님들이 호장이셨기에 무술이 능하셨기에 그 후손으로서 무술에 능하셨다고 본다. 그래서 응양위에 소속된 무관으로 계셨다고 추정된다. 그 이유는 장인이 검교대장군 황한규이신데 검교대장군은 국가에 공을 세우면 주어지는 명예직이다. 국가에 공은 무공으로세웠다는 것이기에 중앙관료들과 연비관게가 있었다는 것이고, 처조부는 호장

황윤규이시고, 처 증조부는 호장 황존우이시다. 또한 외할아버지는 호장 황우룡이시다. 호장층의 집안과 혼인하신 아버지 3세 대상공께서는 아들또한 부인이신 동촌황씨와 같은 집안인 동촌황씨를 며느리로 맞았다. 한국의 창원황씨는 이 세분 호장이신 황량충, 황존우, 황우룡으로 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며 그 후손인 것이다. 鷹揚軍은 용호군(龍虎軍)과 함께 2군으로, 왕의 친위군·시위군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2군은 6위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응양군은 용호군보다도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설치연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응양군의 칭호가 처음 나오는 1018년(현종 9) 이전에는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존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1014년(현종 5) 김훈과 최질이 여러 시위군사들을 선동하여 궁성에서 난을 일으키고 그 이듬해에 제거되었던 사건을 계기로, 궁중의 시위를 전담하고 6위를 통제할 수 있는 특수부대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어 1017~18년 용호군과 응양군이 조직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군의 상장군은 근장상장군(近仗上將軍), 대장군은 근장대장군, 장군은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 불렸다. 그리고 특히 응양군의 상장군은 반주(班主)라 하여,

2군6위의 상장군과 대장군의 합좌기관(合坐機關)인 중방(重房)회의의 의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응양군은 2군6위 가운데 규모가 가장 적어 1영(領)인 1,000명의 군사만을 보유하고 있고, 최고지휘관에는 정3품의 상장군 1명과 종3품의 대장군 1명이 있었다. 영에는 정4품의 장군 1명, 종5품의 중랑장(中郞將) 2명, 정6품의 낭장 2명, 정7품의 별장 2명, 종8품의 산원 3명, 정9품의 위(尉) 20명을 두었으며, 대정 40명도 두었다. 이를 근거로 문관직으로 증직하지 아니하고 무관직으로 증직을 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5세 중현대부 전객령좌사인, 동래부사 황 유 1270년경 출생 추정 중현대부는 종3품 3계이다. 전객은 외국사신을 접 대하는 직책인데 좌사인은 전객령을 보좌하는 직 책을 뜻한다. 동래부사는 동래도호부사가 정확한 명칭인데 종3 품의 관직으로 동래의 모든 행정의 책임자이다. 족보에 기록되길 忠烈王 戊申登文科 忠惠王辛未授 本職有文行( 충렬왕 무신등문과 충혜왕신미수본직 유문행)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를 해석하면 충혜왕 1308년에 문과과거에 합격 하여 이름이 올랐다 충혜왕 1331년 본직을 받았다 학문으로 명성이 있 었다 라고 해석되는데, 이를

자세하게 해석하면 1308년는 충렬왕이 사망 한 해이다. 그래서 전객령 본직은 1331년 충혜왕 떼 받았다 라는 것이다. 700년간 이를 해석한 후 손은 없다. 후손 황병열이 이를 해석하기를 1308 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이름이 올랐으나 23년 뒤 1331년에 전객령좌사인으로 발령을 받았 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데 족보에 올라와 있는 사위 안동권씨 권적(權適, 權廸)의 역사를 살피니 권적은 충혜왕의 심복이었고, 충숙왕의 뒤를 이어 충혜왕이 1330년 왕에 오르니 충헤왕의 심복인 권 적의 영향으로 1331년 벼슬을 제수 받으신 것을 밝혔다. 이러한 설명은 어느곳에도 없으나 권적은 5세조의 사위인 관계로 충분히 그 해석이 가능해 진다. 아니면 무슨 수로 23년만에 관직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충혜왕을 살펴보면 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 이름은 왕정 (王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 충숙왕 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 洪氏)이다.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인 덕 녕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생모)와 찬성사 윤계종 (尹繼宗)의 딸 희비 윤씨(禧妃尹氏), 평리(評理) 홍

탁(洪鐸)의 딸 화비 홍씨(和妃 洪氏),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 林氏)가 있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다가 1330년에 충숙왕 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해 즉위하였다. 그러나 1332년 원나라에 의해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조적 (曺頔) 등이 음모를 꾸며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 暠)를 옹립하려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 혜왕이 복위하였다. 본성이 호협방탕해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 명에 이를 정도 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 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의 간청에도 불 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해 유신들과 반목 이 심하였다. 관제를 개혁해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 거(知貢擧)로, 정승을 중찬(中贊)으로, 평리를 참리 (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 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 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였다. 한편 원나라에 쌍성(雙城: 지금의 함경북도 영 흥)·여진·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데리고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다. 그 해

프로젝트 정보

고객사
족보해설서
제작연도
2019
산업분야
tech
문서유형
전자책
조회수
2,740

설명

레거시 시스템에서 마이그레이션됨 (카테고리: 기타)

태그

#기타
누적 1,500+ 제작 · 24시간 내 무료 견적무료 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