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신세계shinsegae cat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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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선의 주로를 달리는 쪽이 낫다. 하지만 산책은 목적 없는 걸음이
숲으로 갔네 다. 일 없이 걷는 것이다. 숲에서 발길이 흔히 길을 버리는 것은
그렇게 나 혼자서 이 때문이리라. 산과 숲은 다르다. 산에서는 높이가 길을 강요
아무것도 찾지 않는 것 한다. 솟아오른 벼랑이 발을 돌리게 하고, 비탈져 끊어진 길
이 걸음을 조심하게 한다. 날다람쥐처럼 산을 탄다는 이들은
그게 내 뜻이었네.
길 없이도 정상에 오른다고 들었는데, 어릴 적 오르내린 뒷
-괴테의 시 ‘발견’ 중에서 산 말고는 빈약한 팔다리로 언감생심일 뿐이다. 그런데 숲에
서는 모두가 웬만하면 발을 풀어놓는다. 길을 버리고 발에
자유를 준다.
괴테가 걸었던 산책로, 슈타트발트 숲에서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Angra do Heroísmo, Terceira, Azores Islands, Portugal. © Jose A. Bernat Bacete / Getty Images
돌이켜보면, 새벽 산책을 하지 않은 출장이나 여행은 없었다. 낯 숲에서는 누구나 첫 번째 길을 추구한다. 누군가 걸어서 이미 존
선 도시에 가서 줄곧 일만 하고 되돌아오는 것보다 불행한 일은 재하는 길이 아니라, 은폐된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한다. 가만히
없다. 하루 정도 짬을 내 박물관・미술관 또는 지역 명소를 둘러 놓아두면 어떠한 잔디에도 반드시 길이 나는 것과 같다. 사람들
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일부러 찾아가는 것도 즐긴다. 하지만 은 본래 도로의 억압을 싫어한다. 대지에서는 함부로 이를 위반
여명에 불쑥 호텔을 나와 동네 골목이나 강을 따라 해가 뜰 때까 하지 않지만, 슈타트발트에서는 틈만 나면 발을 넣어 미지의 길
지 걷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은 없다. 고요 속에서 한 도시가 건 을 시험한다. 입구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 나무와
네는 말을 음미하고 나면 어쩐지 영혼까지 그 도시를 깊이 사랑 바위 사이 좁다란 틈을 흩어져 파고든다. 남들 눈에 잘 띄지 않
해버리곤 한다. 도시의 새벽을 보지 못한 자는 어쩌면 그 도시의 는 은밀한 쉼터를 찾고 나서 기뻐한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여기 괴테의 쉼터도, 나무 사이로 낙엽에 덮인 희미한 실선을 따라 걷
에 작은 내기를 걸 수도 있겠다. 던 괴테가 문득 멈추어 전망을 즐겼을 것이다.
도서전의 도시 프랑크푸르트로 출장을 가면, 마인 강변 대지는 의미를 생성하지 못한다. 의미는 법 너머에서 온다. 현재 유래했다. 노모스는 무작위한 대지에 임의로 경계를 가르고, 특
을 따라 긴 산책을 하곤 한다. 한번은 틈을 내서 슈타트발트 숲은 대지에 얽매인 영혼을 해방한다 의 질서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 존재하고서야 사람들은 의미를 추 정한 질서를 부여해서 배분하는 일이다. 밭과 풀밭 사이에 두둑
Stadtwald에 들렀다. 괴테 때문이다. 이 숲에 괴테가 걸었던 산 인간은 출입금지를 위반하는 것을 정말 사랑한다. 곳곳에 난 샛 구하기 시작한다. 그늘 속 작은 꽃에서 연인의 아름다운 눈동자 을 마련하고, 마을과 숲 사이를 벌목해 구분한다. 이로써 인간이
책로가 있고, 앉아서 마음을 다듬던 쉼터가 있다. 독일어로 슈타 길을 보라. 사람들은 길을 흔들고 밟고 넘고 무너뜨린다. 정해진 를 마주치면, 사람들은 새로운 언어를 찾는다. 도대체 언제 숲으 사는 공간과 살지 않는 공간이 나누어진다.
트Stadt는 도시, 발트Wald는 숲이라는 뜻이니, 슈타트발트는 저 너머에 꽃이 있고 나비가 춤추고 새들이 노래하기 때문이다. 로 가고자 했던가. 자유를 실행해보려고 했던가. 쳇바퀴 도는 생
시유림을 말한다. 서울숲 같은 곳이다. 마인강 남쪽에 있는 약 숲속의 길은 자유가 만든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따라간 활의 리듬이 견딜 수 없을 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우울에 숲길을 걷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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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8만m (1천5백만 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숲으로, 아름 발들이 만드는 것이다. 나무와 수풀이 있다고 숲이 아니다. 설계 시달릴 때,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은 공허에 빠졌을 때, 저 멀리 대지의 정신은 분석이다. 나누고 쪼개어 모으고 갈라서 선을 긋
다운 야코비바이허Jacobiweiher 호수가 있고, 지금은 불타 없 자의 뜻대로 정해진 루트를 좇아 움직이는 곳은 공원에 불과하 숲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고 의미를 부여한다. 대지를 가로지르는 수평과 수직의 선으로부
어진 높다란 괴테 전망대가 있었다. 길이만 6km이므로, 하루에 다. 숲에서는 모든 것이 유동한다. 아무도 길 따라 걷지 않고 걸 터 인간은 인공의 정체성을 얻는다. 부유함과 가난함, 다스림과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숲의 역사는 1372년부터 시작되며, 어서 길을 만든다. 바람을 좇고 물을 따르고 바위를 찾아 무작정 숲의 존재는 삶의 거룩함을 환기한다 부림, 정상과 비정상, 질서와 무질서, 어둠과 빛 등으로 나누어진
1726년 이후 나무를 심어 현재에 이른다. 침입하고 아무 데나 눕는다. 숲은 대지에 얽매인 우리의 영혼을 학창 시절 수업을 빼먹고 무심코 발을 디딘 관악산 숲이나 직장 다. 채소와 나물이 구별되듯, 지위나 신분이나 재산에 따른 온갖
해방한다. 괴테는 노래한다. 에 다닐 때 평일 낮에 어쩌다 미팅을 핑계 삼아 헤맸던 남산 숲 규칙이 출현한다. 대지에서는 누구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산책은 목적 없는 걸음이다 ‘그늘 속에서 보았네/ 작은 꽃 한 송이/ 별처럼 빛나며/ 눈 은 비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괴 숲은 우리를 구속하는 대지의 선을 파괴한다. 숲속의 길은
줄지어 선 참나무, 너도밤나무, 소나무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다. 동자처럼 아름다웠네.’ 다리에 자유를 부여해야 보이는 것이 있 테의 산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정신의 위대함이야 두말 한 해가 가기 전에 저절로 희미해진다. 풀이 자라고 낙엽이 덮고
필요할 때 임도로 사용되는 널찍한 길이다. 그러나 갈 방향을 대 다. 그늘은 빛이 닿으면 사라져 눈에 띄지 않고, 그늘 안 존재들 할 필요 없지만, 귀족이 아니었던 괴테는 직장인으로 평생 일하 바람이 지워버린다. 대지가 명사라면, 숲은 동사다. 세상에서 인
충 정한 후 나무 사이를 무작정 걷는 쪽이 더 좋다. 울창한 나무 은 그늘의 어둠 탓에 흔히 감추어진다. 신이 아니므로 인간은 무 지 않았던가. 삶에는 반드시 거룩함이 필요하다. 억압된 욕망을 간이 사라진다면, 오래지 않아 인간의 마을은 숲으로 돌아갈 것
가 하늘을 가려 그윽한 그늘을 만든다. 틈틈이 새어드는 빛을 받 한히 인식할 수 없다. 큰 꽃을 보면, 작은 꽃은 보지 못한다. 밝 어떻게 하든 덜지 않으면, 인간은 도무지 불행을 이겨낼 수 없다. 이다. 숲을 찾는 것은 이러한 숲의 무시무시한 힘을 얻어 자유를
으며,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인다. 음을 보면, 어둠은 망각한다. 한 가지에 정신을 팔면, 눈앞에 고 숲의 존재는 이 엄연함을 우리에게 환기한다. 미칠 것 같으면 숲 잃고 시들해진 정신을 깨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슈타트발트 숲
이 숲에서 괴테도 홀로 비슷한 걸음을 걸었을 것이다. ‘숲 릴라가 지나가도 대부분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미약하다 해 길을 걸어야 한다. 무작정 자유를 시험해야 한다. 에 다녀온 밤의 노트는 괴테의 시로 끝난다.
으로 갔네/ 그렇게 나 혼자서/ 아무것도 찾지 않는 것/ 그게 내 서 빛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지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숲은 자유롭다. 〈대지의 노 ‘이제 그 꽃 자꾸 가지 뻗어/ 그렇게 계속 꽃피고 있네.’
뜻이었네.’ 시 ‘발견’에서 괴테는 숲에서 무엇을 위해 걷지 않는 모든 것은 저마다 빛을 품고 있다. 목적 없는 자유가 인도할 때 모스〉에서 독일의 철학자 카를 슈미트는 “대지는 법의 어머니” 자유의 꽃은 지지 않는다. 가지를 뻗어 자꾸 꽃핀다. 마음에 이
다고 고백한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무엇을 우리는 대지에서 놓쳐왔던 것에 눈길을 돌릴 수 있다. 보라. 저 라고 말했다. 라틴어 노모스nomos는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을 꽃이 피어 있는 한, 노예적 일상의 무미함도 얼마만큼은 버틸 수
위해 가지 않는다. 유용성을 벗어던진다. 무언가를 찾으려면 직 만치 꽃이 피어 있다. 말한다. 이 단어는 ‘나누다’라는 뜻의 동사 네메인nemein에서 있을 것이다. 이것이 숲길을 걷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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