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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숲속의 길은


          자유가 만든다




          좋은 여행자는 여행을 두 번 간다. 처음엔 발로, 나중엔
          손으로 걷는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코로 냄새 맡고 피부로 느낀 것을 언어로 바꾸어 백지에 새길
          줄 안다. 발로 걸어 탐색한 곳을 내적 지도에 옮겨 적는다.



          writer 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에크프라시스ekphrasis. 감각을 언어로 바꾸는 실천이 없을 때, 우
         리는 아직 그 장소의 중심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여준 후
         에 꽃은 비로소 꽃으로 남으니까 말이다. 대낮의 체험을 꺼내(ek-)
         한밤의 이야기(phrasis)로 만들 수 있을 때, 육체가 겪은 어지러운
         체험은 정신이 정련한 생생한 경험으로 남는다. 여행자는 ‘낮에는
         모험의 땅에서 길을 가고, 저녁이면 글쓰기의 땅에서 길을 간’(실뱅
         테송의 〈여행의 기쁨〉 중에서) 후에야 완성된다.
             나는 여행을 완성한 적이 있던가. 여행지에서 한번이라도 걸음
         의 시를 쓰고, 몸의 산문을 기록해보았던가. 밤이면 하찮은 흥분을
         못 이기고 술에 젖거나 일정을 핑계로 지친 몸을 잠으로 밀어 넣기
         일쑤였다. 시간을 좇아 사진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은 여행이 아니다.
         발의 여행은 닿는 대로 할 수 있지만, 손의 여행은 ‘아무 말 대잔치’
         가 아니라 내적 질서를 담은 ‘잘 빚은 항아리’ 같아야 한다. 머릿속

         으로 수많은 여행을 떠올리지만 절망에 빠질 뿐, 이러한 여행을 흉
         내라도 낼 수 있다면 정녕 행복할 것이다.
             후보가 없지는 않다. 설악산 온갖 숲을 틈나는 대로 찾아 수십
          차례나 헤매고 다녔을 때, 제주도 비자림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도무지 발길을 돌릴 수 없었을 때, 흰머리를 한 안나푸르나를 올려                                                                                                                                                                                                         County Cavan, Ireland © Mariuskasteckas / Getty Images
         다보는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사흘 내내 원 없이 걸었을 때. 아니다.
         설악은 사시사철 아름다우나 번잡해 충분히 신비하지 않고, 비자림
         은 단아하나 깊이가 얕아 잠깐의 관광에나 적합하며, 히말라야는
         낯설고 두려워 충분히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다. 모두 소소한 글을
         남겼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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